최근 대통령실과 국민의 힘인 여당이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경제의 미래가 걱정된다. 그들이 내세우는 반대 논리는 과거 재벌 중심 경제 체제의 관성에 갇혀 있을 뿐, 글로벌 스탠다드와 현대 기업지배구조의 흐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1. '기업 부담 증가' 논리는 누구를 위한 기업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이사회가 '부담'없이 운영되는 이유는 이사회가 본연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단순히 대주주가 정해놓은 방향에 거수기 역할만 하면 되니, 당연히 '부담'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이사회 제도의 근본적 취지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이사회는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치열한 토론과 검증을 통해 최선의 방향을 도출하라고 만든 기구다. 고려아연 사태에서 보듯, 2조 3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자금 차입과 89만원이라는 고가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할 때 이사회는 과연 얼마나 치열한 토론을 했는가? 실제로는 단 한 차례의 이사회로 이 모든 것이 결정됐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이사회가 '부담'없이 운영되는 실체다.
대주주만을 위한 기업이라면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모든 주주와 이해관계자를 위한 기업이라면 이는 부담이 아닌 당연한 의무다. OECD 회원국 중 주주 충실 의무가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진정한 의미의 이사회 운영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기업지배구조의 후진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실제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기업들의 성과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이사회는 때로는 며칠에 걸친 토론을 통해 중요 의사결정을 한다. 이들 기업의 이사회에서는 CEO의 제안이 거부되는 일도 흔하다. 이런 '부담스러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나은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건강한 긴장관계가 오히려 이들 기업의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이런 후진적 제도가 한국 기업들의 주가수익비율(PER)이 글로벌 평균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는 'Korea Discount'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이사회 운영이 부담스럽다면, 그것은 경영진의 능력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 '주주 간 갈등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현재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는 것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액주주들이 대주주의 전횡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참정권이 없던 시절에 민주주의 국가보다 독재 국가에서 '갈등이 적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의 반대는 무시됐고,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비스 설립 과정에서 제기된 우려도 묵살됐다. 대주주들은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반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진짜 이유다.
특히 우리나라 상법에는 '주주 충실 의무' 조항이 없어, 대주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와 다른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해도 이를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사회에서 '폭력 사건이 적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상법 개정은 오히려 이런 숨겨진 갈등을 제도적 틀 안에서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과 기관투자자들의 비중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런 후진적인 제도는 오히려 더 큰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법적 보호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대주주의 독단적 경영이 계속된다면, 결국 외국자본의 적대적 M&A나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제도화된 갈등 해결 장치의 부재가 오히려 더 극단적인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3. '기업 경영의 자율성 침해' 주장은 가장 허구적이다. 과연 누구의 자율성인가? 1.84% 지분으로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자율성인가? 아니면 98.16%를 차지하는 다른 주주들의 자율성인가?
여기서 말하는 '기업 경영의 자율성'이란 결국 대주주의 자의적 경영 자유를 의미한다. 현재 이사회가 대주주의 거수기 역할에 충실한 상황에서, 자율성이란 곧 대주주가 아무런 견제 없이 회사를 운영할 자유를 뜻한다. 이는 마치 독재자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통치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자율성'이 종종 회사 자산의 사적 유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계열사 간 부당한 내부거래, 일감 몰아주기, 회사 자금을 활용한 경영권 방어 등이 모두 이런 '자율성'의 결과물이다.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 의혹, 이그니오홀딩스 투자 관련 선관주의의무 위반 의혹 등은 이러한 '자율성'이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의 기업 자율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이해관계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가운데,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자유일 것이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고, 주주들의 권리가 보장되며, 경영진이 적절한 견제를 받는 것, 이것이 바로 건전한 의미의 자율성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보자. 애플의 팀 쿡 CEO는 이사회에서 제안이 거부되더라도 이를 기업 자율성 침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회장도 주주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사회의 견제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이러한 견제와 균형이 있기에 더 혁신적이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자율성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사 자금을 마음대로 쓸 자유가 제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2조 3천억원을 들여 자사주를 매입하는 '자율성', 우리사주조합을 동원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자율성',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자율성'이 제한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특권적 자율성의 보장이 과연 기업과 국가 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4. '대안적 접근'을 운운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구체적 문제만 해결하겠다는 것은 결국 현재의 기업지배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개별 사례에 대한 대증요법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실제 기업들의 성과다. 이사회 독립성이 높고 주주권리가 잘 보장되는 기업들의 성과가 그렇지 않은 기업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미국 S&P 500 기업들의 평균 사외이사 비율은 85%에 달하며,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기업도 59%에 이른다. 반면 한국의 경우 사외이사의 독립성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이사회 의장과 CEO 분리는 아직도 예외적인 사례로 취급된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이미 우리 기업들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의 PER가 글로벌 경쟁사들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반영된 결과다. 상법 개정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주목할 점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다.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새로운 형태의 기업지배구조를 실험하고 있다. 구글의 차등의결권은 창업자의 혁신 의지를 보장하면서도, 이를 철저한 이사회 감독과 주주권리 보장으로 균형잡고 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오너 일가의 자율성'이라는 구시대적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이제 결단해야 할 때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상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진정 기업의 발전을 원한다면,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업 친화 정책이자, 우리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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