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려아연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최윤범 회장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의 민낯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금융투자소득세 논란에 가려져 있지만, 이번 고려아연 사태는 우리나라 상법 개정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불과 1.84%의 지분을 가진 최윤범 회장. 특별관계자를 모두 합쳐도 15.65%에 불과한 지분으로 회사를 좌지우지해왔다. 이번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무려 회사의 자금 2조 3천억원을 동원했다. 하나은행 4천억원, SC은행 5천억원, 메리츠증권 1조원, 한국투자증권 2천억원, KB증권 2천억원 등 대규모 차입을 일으켜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매입 가격이다. 주당 89만원이라는 고려아연 상장 이래 최고가로 자사주를 매입했다. 개인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회사의 미래를 저당 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른 주주들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각자의 권리를 지분대로 나눠 가진 다른 주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이사회의 역할이다. 과연 이사회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 독립적인 판단을 했을까? 2조 3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차입과 고가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할 때, 이사회는 정말 회사의 미래를 위한 냉철한 판단을 했을까? 아니면 단순히 최윤범 회장의 의중을 반영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친 것은 아닐까?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것은 유상증자 결정이었다. 이사회는 2조 5천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정하면서, 과연 이것이 회사의 재무건전성 개선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 아니면 단순히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우리사주조합에 20%라는 큰 물량을 배정한 것은 임직원들을 경영권 분쟁의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사회가 진정 독립적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어야 했다:
- 89만원이라는 고가의 자사주 매입이 회사와 주주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
- 2조 3천억원의 차입이 회사의 재무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 유상증자는 정말 회사의 재무건전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경영권 방어를 위한 것인가?
- 임직원들에게 과도한 재무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 옳은가?
하지만 이사회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지 않았거나, 던졌더라도 그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경영진의 뜻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나라 이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순히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임직원들의 부담은 실로 엄청나다. 계산해보면 한 명의 임직원당 약 2억원이라는 거액을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1년간의 의무보호예수 기간이 있어 주식을 매도할 수도 없다. 대출을 받아 참여한다면 금리 부담은 물론이고 주가 하락 시의 반대매매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방패막이로 동원된 셈이다.
MBK·영풍 연합이 제기한 의혹들도 주목할 만하다. 원아시아파트너스가 운용하는 사모펀드 투자 관련 배임 등 의혹,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 관여 의혹, 이그니오홀딩스 투자 관련 선관주의의무 위반 의혹, 이사회 결의 없는 지급보증 관련 상법 위반 혐의, 일감 몰아주기 관련 의혹 등이 제기됐다. 이런 의혹들에 대해서도 이사회는 제대로 된 검증이나 조사를 진행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현행 상법 체계의 맹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소수 지분으로도 절대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에서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보다 오너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현재 주식시장은 금융투자소득세 논란으로 뜨겁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상법 개정이다. 소수 지분으로도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현행 제도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특히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견제와 감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최윤범 회장께서는 의도치 않게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의 개혁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소수 지분으로 회사를 좌지우지하며 다수 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현행 상법 체계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과연 이런 구조가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
최윤범 회장께서 우리에게 던진 이 질문들에 이제는 답해야 할 때다. 상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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